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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14~17세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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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코스모 2025. 1. 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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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을 감소시켰다. 노동 인구의 감소는 농민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봉건제의 쇠퇴를 가져와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흔들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은 봉건 사회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14세기 교황권의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1379-1417)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히며 교회의 도덕성과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간"의 발견,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지적 밑거름이 되었다. 15세기 중반 쿠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발명한 인쇄술은 지적 호기심과 사상을 더 빠르게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세의 종말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종교, 사회, 정치 등을 근본적으로 재편성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시대를 전환시켰다. 봉건제의 쇠퇴는 중산층의 성장을 가져왔고, 도시화는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으며 인문주의와 과학적 사고는 유럽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한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힘을 얻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의 권위를 크게 위축시켰으며 가톨릭 교회는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에 맞서는 쇄신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가톨릭의 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 이라고 하며 영어로는 'Counter-Reformation' 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등의 측면에서 변화를 꾀하였는데 바로크 예술과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앙의 수호와 확산, 교육, 선교활동을 위해 설립된 "예수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의 결정을 실행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했으며 가톨릭의 부흥과 현대적 조직체계, 신학적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수회는 1540년, 스페인 사제이자 신학자인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 가 주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으로 설립하였다.

1538년 그의 동료들과 "예수의 동반자 모임"을 교황 바오로 3세(제 220대 교황(1534-1549), 1468-1549)로 부터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는 중 환시를 보고 정식 수도회로 확장하기로 한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확장 저지", "가톨릭 교회의 부흥" 등을 당시의 시대적 소명으로 여겼다. 개신교의 탄압에서 가톨릭 교회 자체의 쇄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교회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신학과 철학, 수학, 과학 등 이과적인 학문과 다른 종교들의 문화에도 적응해야 한다는 노선을 내세웠으며 이는 수도회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했다.

 

1540년 「예수회 헌장」을 바오로 3세에게 전달했으며 같은 해 9월 27일 교황의 칙서 <전투 교회의 통치-(Regimini militantis Ecclesiae)>로 허가를 받는다. 1541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메시나라는 도시에 첫 예수회 학교를 개교하고 1551년 로마에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고등 교육 기관인 로마인 대학을 설립한다. 1556년 교황 바오로 4세의 승인으로 최초의 예수회 대학(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이 만들어졌다.

 

예수회는 창립자인 로욜라의 기도와 영적 체험을 서술한 저서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을 지침으로 종교·교육 · 문화 · 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세속과의 교류를 많이 하는 재속 사제 생활 공동체에 가깝다.

예수회는 로욜라를 중심으로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빠르게 확장하였으며 독일, 동유럽, 영국,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에서 개신교와 대립했다. 

 

예수회 계열의 성당들은 예술적으로 검소한 개신교 예배당에 대비하여 더욱 화려한 바로크적인 장식으로 천국의 모습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성 이냐시오에게 바쳐진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인 캄포 마르치오 성당"(1626-1650) 의 안드레아 포초가 그린 거대한 천장화 '성 이냐시오의 영광'이다. 조각과 건축, 회화가 어우러진 입체적인 환각 효과를 보여주는데 주로 바로크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콰드라투라(Quadratura)기법이라고 한다. 

☞ 콰드라투라(Quadratura)기법: 착시효과를 이용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미술기법, 단순히 구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간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중점을 두며 관객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는 효과.

 

성 이냐시오의 영광(안드레아 포초, 산티나치오 디 로욜라 인 캄포 마르치오 성당), namu.wiki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자체 정화, 개혁의 정점으로 개신교의 반동으로 일어난 개혁이긴 하지만, 가톨릭의 자체적 또는 내부적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고위성직자, 수도회의 부패와 하위성직자들의 무지는 신자들의 고통과 연결되었다. 공의회의 소집 목적은 이단(개신교)의 근절, 행실의 개혁이었다.

공의회가 소집된 것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1500-1558)의 요구 때문이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봉자이자 수호자로써 개신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미 신성로마제국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종교적 분열을 맞고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탄압에도 개신교의 교세는 확산되고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규칙,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개신교가 성상과 화려한 교회 장식을 우상숭배로 비판하며 검소하게 예배당을 꾸미는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예술은 신앙심 고취를 위해 신앙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경건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도구이며 교리 교육을 위한 시각적 설명으로 문맹이 많던 대중들에게 신앙을 쉽게 전달하려 했다.

 

예술에 대한 기준은 명확성(성경이야기, 교리에 대한 표현), 감적적 호소(경건과 감동), 도덕적 순수성(외설적이지 않고 부도덕한 요소 배제, 교회의 가치 반영) 등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같은 주장으로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도록 권장한데 반해 카톨릭 교회는 전통과 성경의 해석권을 강조하며, 신앙 교리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가톨릭 신앙의 핵심요소를 체계적이고 일관성있게 정의하였으며, 종교 예술에서도 명확성을 요구하여 복잡하고 난해한 상징을 배제하고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선호하였다.

 

개신교의 설교 중심적 예배와 결을 달리하는 가톨릭교회는 시각적, 감각적 요소를 신앙 전달의 전략으로 삼았다. 감정적 호소력을 강조한 바로크 예술의 부흥으로 이어졌는데 극적인 빛과 그림자, 동적인 구도, 생생한 인물 표현은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을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도덕적 순수성은 중세 후기의 고위성직자의 부패, 수도회의 권력남용, 하위 성직자의 무지 등 비윤리적인 비판에 대응하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교육을 통하여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 설립을 의무화하였고 종교 예술에 신성함과 경건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쇄신의 노력은 종교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신앙심을 고취하고자 하였으며, 바로크 예술의 기반이 되어 예술적·종교적 부흥, 가톨릭 종교개혁 이후 시대의 문화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어져 오고 있다.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성 마태의 소명), 카라바조(1599-1600), wikipedia.org

이시기 대표적 예술가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등이다.

 

위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명확성과 감정적 호소력을 구현한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빛과 어둠의 극적대비를 통해 신의 은촉과 신성한 순간을 전달하고 있다.

☞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기법 -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이용해 입체감과 깊이를 표현하는 미술기법, 이탈리아어로 '밝음'(Chiaro)과 '어두움'(Scuro)의 합성어로 음영법이라고도 불린다.(https://brunch.co.kr/@cch60/252)

 

본명은 미켈란젤로 미리시 다 카라바조,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1571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페스트로 부친과 형제 일부가 세상을 떠났고 불안정한 성격으로 어두운 삶을 살며 도피생활 중 세상을 떠난 예술가이지만  유럽 미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고,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우어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기법은 이후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 바로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The Conversion of Sanint Paul, 카라바조(1600), ko.wikipedia.org

 

스페인 출신의 카라바조가 38세의 짧고 어두운 생애와 달리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는 1588년 나폴리에서 13남매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피에트로 메르니니는 예술적 천재성을 드러낸 베르니니를 위해 예술과 조각교육을 가르쳤고 1606년 아버지가 교황청에 고용되어 로마로 갔다. 바오로 5세의 조카 스키피오네 보르레세 추기경의 관심을 끈 베르니니는 바오로 5세에게 추천했고 교황 직속 예술가로 고용된다.

 

본명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이며 그의 생애 바오로 5세(재위 1605-21) 부터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76) 까지 7명의 교황을 거쳤다. 

20세 초반 (1619년~1622년) 사이 가장 대표적인 4개의 작품이 유명하다. '아이네아스, 안키세스, 아스카니우스',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로와 다프네','다비드' 상 등이 있으며 사실적이면서 극적이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서양 조각사에 새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Ecstasy of Saint Teresa(성녀 데레사의 환희), 베르니니(1647-1652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의 코르나로 예배당에 있는 조각 제단화 그룹 중 아나이다. 스페인 카르멜회 수녀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1515-1582)가 본 환상(체험)을 쫓고 있다.

 

예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 그 시대를 쫓아 가다보니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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