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건축은 지나친 신 중심의 감성적, 낭만적 경향에서 고전주의 예술을 추구하였고 고전 건축의 구성원리를 이론화하고 체계화 하였다. 합리적, 과학적 사고방식을 추구하였고 수학적 비례체계에 바탕을 두고 조화, 질서, 균형과 통일에 의한 형태미를 추구하였다.
초기 르네상스(1420~1500)에는 이탈리아의 상공업 도시인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주범, 아치, 앜;이드 등의 고전적 요소가 장식적 요소로 사용되었고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쪼 등이 활동하였다.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은 초기 건축양식을 정립하고 이전시대의 고전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돔은 1420년 여름에 시작하여 1436년에 마무리 되었는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직경 45.4미터, 최고 높이 90미터이다.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위에는 둥근 창에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등의 작품이 채워졌다.
1419년 양모상인 조합은 거대한 대성당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열었다.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경합을 벌여 블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를 맡게 된다. 돔의 건설은 순탄치 않았다. 고대 로마시대의 콘크리트 사용법이 없어진지 오래여서 벽돌을 가지고 돔을 만들어야 했다.
구조물의 무게는 37,000톤, 4백만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고, 무거운 돌을 올리는 특수한 기계도 만들었다. 돔이 세워진 150년 이후에야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 넘게 된다.
미켈로쪼 디 바르톨로메오(B.Michelozzo, 1396-1472)는 블루넬레스키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가의 전속 건축가로 활동하였고 메디치궁, 스트로찌궁 등을 설계하였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Palazzo Medici Riccardi)은 현재는 피렌체 광역시청과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444년과 1484년 사이에 걸쳐 건설되었다. 루스티카와 절단석, 조적조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 건축에 사용된 3층 구조는 이성, 질서, 인간 척도에 대한 고전주의적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1494년 망명할 때까지 메디치 가문의 주요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후 권력을 되찾은 메디치 가문은 1540년까지 거처로 사용되다 코시모 1세 대 메디치가 베키오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메디치 가문의 젊은이들이 거쳐로 계속 쓰이다 1659년 매각되었다.
* 루스티카(rustication) - 서양의 석조건축에서 외화장법의 일종, 돌에 요철을 만들고 견고함과 위용을 표현하는 기법. 벽돌이나 석재블럭의 주변부를 거칠게 다듬어 명암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식(https://blog.naver.com/kh141/130180122789)
이 곳에는 베로초 고촐리가 1459년 경 완성한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마기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삼인의 현자들의 안내에 따라 토스카나를 가로 질러 행진하는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1392-1448),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1368-1437)를 비롯한 메디치 가문과 이들의 동맹을 맺은 이들에 대한 초상과 세부 묘사로 꾸몄다.
중기 르네상스(1500~1540)에는 종교적, 예술적 중심지였던 로마로 영역이 넓혀졌으며 도나토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상가로 등이 주역이다.
도나토 다뇰로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 1444-1514)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부탁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을 고치는데 일생을 바친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1499년 로마로 이주하여 고대 건축 양식을 연구하고 중앙당 형식의 성당 건축 양식을 확립하였다. 바티칸 궁전,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등에 흔적을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기 시절 도움을 많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벨베데레 정원은 교황 율리우스 2세(1443-1513, 재위 1503-1513)가 바티칸 소장의 조각품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브라만테에게 의뢰하였다. 1487년경에 지어져 있었던 인노첸조 8세(Innocenzo VII)의 카지노 델 벨베데레(Casino del Belvedere) 와 같은 주변에 있는 다른 건축물과 교황의 처소를 연결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브라만테는 콜로세움의 모델로 하였고 혁신적인 원근법으로 "이탈리아식 정원'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브라만테와 율리우스 2세는 이 공사의 완료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Santa Maria della Pace) 성당은 1480년에 건립되었고 1500~1504년 경에 올리비에로 카라파 추기경이 의뢰하여 브라만테에 의해 회랑이 만들어 졌다. 회랑의 아치 열은 가는 원주를 아치로 연결하는 방식을 버리고 고전적인(콜로세움) 방식을 채택하였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2세(Antonio_da_Sangallo_il_Giovane, 1484-1546)는 150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섬기기 위해 삼촌 줄리아노와 함께 로마로 갔고, 짧은 견습 기간 후, 산 피에르토로 건설 현장의 건축가인 브라만테의 조수가 되었다. 브라만테가 죽자 1516년부터 성베드로 대성당 건설 현장에서 라파엘로의 공동 보조자가 되었다. 라파엘로가 죽자 1520년 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였다. 그의 죽음 이후 미켈란젤로가 그 뒤를 이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 거장이다. 피에타(1499), 다비드(1501) 등을 조각한 타고난 조각가이다. 1505년 새로 임명된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와 교황의 표를 짓는 일을 위촉 받았는데 3층 높이에 실물대 조각상 40점 등 거대한 건축물을 구상하였는데,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작업 병행하다 결국 40년이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율리오 2세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은 그는 천지창조, 인류의 타락, 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 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하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하였다.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했는데 관절염과 근육 경련,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감 안료로 눈병도 생겼다고 한다. 1535년 미켈란 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로 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 벽화를 위촉받고, 6년에 걸처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인 바티칸 궁전(사도궁)이 있다. 거대한 홀, 귀빈실, 사실, 부속 성당 등 전체 방의 갯수가 약 1,400개나 된다고 한다. 바티칸 내에 있는 교황이 거주하는 관저로 교황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5세기 무렵 세워졌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오면서 교황의 정식 주거지가 되었다. 이들 건물들의 수세기에 걸친 증축·개축에 당대 르네상스의 건축 ·조각 ·회화의 거장들이 다 참가하였다.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 가로, 마델로, 베르니니 등이 이들이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14세기 비스콘티 가문의 궁전이었는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의 권력을 차지하면서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예술가들과 작업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 고미술박물관이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라는 미완의 대리석상(죽음 직전까지 만들고 있었다는)이 전시되고 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는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는 피렌체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등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로마로 간 그는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1509-1511)이 포함된 프로스코 연작을 시작한다.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장식 등의 감독책임을 맞고 있던 라파엘로는 37세의 생일에 갑자기 요절한다. 성모자상의 성모의 자태나 피라니드형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매장' 에서는 미켈란제로의 선의 움직임도 보인다.
이 시기 부터 '매너리즘'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또는 타성으로 번역된다. 1520년대 시작으로 1530년대 확산되어 바로크 양식이 등장하는 16세기까지 지속되고, 북부 매너리즘은 17세기 초까지 계속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바사리, 초기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의 조화로운 이상과는 다르다.
비례, 균형,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반대로 이러한 특성을 과장하여 종종 비대칭이거나 부자연스럽게 구성한다.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장연스러운 조명 등으로 표현한다. 매너리즘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미켈란젤로라고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신앙에 깊게 빠져들었던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르네상스적인 안정감이 무뎌지고 격정적이고 비례를 일부 포기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최후의 심판>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인물들은 눈에 띄게 근육질이고 길며, 과장된 포즈로 강렬한 감정과 드라마를 전달한다. 특히 몸통과 팔다리의 해부학적 왜곡은 비율과 균형이라는 고전적 이상에서 벗어난다. 또한 질서정연하고 직선적인 원근법을 버린 듯하다. 대신 인물들이 겹쳐지고 공간을 가득 채우는 혼란스럽고 소용돌이치는 구성을 창조하여 역동적이고 거의 압도적인 움직임과 감정을 표현한다.
메디치 예배당은 피렌체에 위치한 예배당 두 곳을 가리키며, 산 로렌초 성당의 부속 건물로서 건설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사그레스티아누오바(신 제의실)과 메디치 가문과 건축가들의 협업작인 카펠라 데이 프린치피(군주들의 예배당)이다.
45세의 미켈란젤로는 1520년 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로 메디치 가문의 영묘(신 제의실) 제작을 계약한다. 1534년까지 피렌체에 머물며 신 제의실의 조각을 만들었다.
영묘 조각에서 [밤 Night], [낮 Day], [황혼 Twilight], [새벽 aurora] 등 '시간' 을 의인화하여 묘사했다. 그가 표현한 '시간'은 육체에 종속괸 영혼을 어지럽히는 고통을 상징한다. [밤]과 [낮]은 느무르(Nemours) 공작 줄리아노의 묘소를, [황혼]과 [새벽]은 우르비노(Urbino) 공작 로렌초 2세의 묘소를 장식한다. [신 제의실] 오른쪽 줄리아노 무덤에는 벽감 안의 줄리아노 아래 좌우에 [밤]과 [낮]이 있다. 무인과 미소년의 모습을 함께 지닌 [줄리아노 상]은 균형미가 높은 작품으로 아그리파, 다비드, 밀로의 비너스 등과 함께 유명한 석고 데생의 모델 '줄리앙(Julien) 이다.
줄리아노는 인체 구조상 불가능한 왜곡된 자세로 만들어져 있어 매너리즘의 작품 같아 보인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leeis56&logNo=221489426751&photoView=20)
스포르체스코 성의 고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도 미켈란젤로의 말연 작품이다. 젊은 시절의 피에나, 다비드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작품의 미완성 품질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신비적인 신플라톤 주의로 나아가는 미켈란젤로의 후기 진행과 일치한다. 그는 조작품을 대리석에 잠재되어 있고 단지 불필요한 재료를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순전히 영적인 아이디어를 직접 전달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적 상징에서 물질적 품질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Blunt, Anthony, 1994, 1450-1600년 이탈리아 예술이론)
조각품은 미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여러 각도에서 보기 위해 움직일 때 눈에 보이게 되는 지속적인 과정의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Ivana Vranic, 2010, 조각된 물질과 형태의 가시성: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조각의 존재론적 본질)
그는 죽기 불과 6일 전에 하루 종일 조각상을 작업했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기.. 그의 깊은 곳에서는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을까..
후기 르네상스(1540~1580)에는 미켈란젤로의 건축에서 유래된 매너리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다양하고도 의도적인 조작을 통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건축을 추구하였다.
이 시기 유럽은 심각한 정치적 격변기였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는 내부 갈등과 프랑스, 스페인 등 중앙집권화된 국민 국가의 등장으로 권력을 잃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 이후 왕권이 강화되며 점차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다. 스페인은 1492년 레콩키스타(영토회복운동)을 완성하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 나몰리와 시칠리아도 통치하고 있었다. 1519년 독일-오스트리아에는 젊은 황제 카를 5세가 등장했다.
당시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문명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던 이탈리아, 유럽 각국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지도국가의 지위를 공인 받기 위해서 이탈리아 반도를 원했다. 카톨릭 교회의 수호자이자 대륙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원했고, 그러기 위해 교황으로 부터 공인을 받아야 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이러한 분위기에 대응하 하지 못하고 혼란한 상태였다.
르네상스의 풍요를 누리고 있던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는 독일·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가 66년 동안 전쟁을 치뤘다. 1496년에서 1559년간 벌어진 8차례의 전쟁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막을 내렸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기존 교회를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다. 부패한 교황제도 중심의 서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다. 르네상스로 인한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고대 문확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제도의 붕괴 등 중세의 사상적 기초는 흔들렸다.
코냑동맹전쟁(1526-1530)이 진행 중이던 1527년 5월 6일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도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리고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은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여 7개월간 자진하여 유폐 생활을 하였다. 지휘관인 필리베르트가 병사들에게 약탈중지를 명했지만 이를 따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물건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뜯겨 나갔고 빼앗기며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제국군의 상당수는 루터교의 신자들이라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정도로 생각하였고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로마는 초토화되며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전성기 르네상스는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제국군은 9개월간 점령하며 로마 주변 지역을 약탈하다 1528년 2월 중순경이 되어서야 철수한다.
* 코냑동맹전쟁 -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자 교황령,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페라라 등의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황제를 상대로 벌인 전쟁
서방교회 개혁을 주장한 종교개혁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을 시작으로 개혁을 진행하였다. 반종교개혁은 후기 르네상스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술을 종교적 교육과 설득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개신교의 성상 파괴에 대응하여 카톨릭 도상학과 상징주의의 사용을 강조하였고, 예술가들은 성례전, 성모 마리아, 성인 등 가톨릭 신앙의 주요 인물과 상징을 묘사하도록 권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