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르네상스(14~17세기) - 1

카테고리 없음

by 유이코스모 2025. 1. 6. 21:25

본문

고전, 고대의 부흥과 르네상스 예술의 번영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탄생(부활)"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다. 르네상스의 용어는 "재상" 또는 "다시 깨어남"을 의미하는 라틴어 "renascntia"에서 파생되었다.( "re-"(다시)와 "nasci"(태어나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슐레(Jules Michelet)가 프랑스사(1833~67) 중 "르네상스~프랑스혁면 전(1856~1867)"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문예부흥, 학예부흥으로 알려진 르네상스는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났으며, 문화와 예술의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대한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사람들의 눈은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제 유럽의 역사는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빛은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으로 퍼져나갔고 기독교에 대한 개혁을 부르게 된다.

 

14세기 이전 유럽의 르네상스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들 수 있다. 8세기 후반에서 8세기까지이며 사를마뉴 이후 통치기간이다.  아헨(Aix-la-Chapelle)에 궁정학교, 카롤링거 소문자를 개발, 고전 문헌의 보존, 고전 로마와 비잔틴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과 건축, 종교 및 신학 학문의 부활등의 업적이 있고 이후 중세시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카롤링거의 르네상스는 12세기 르네상스, 14~17세기의 후기 중세 발전과 근세로 가는 길을 예비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흐름을 특정할 수 없듯이, 르네상스와 중세도 그 시작과 끝을 특정할 수는 없다. 알려진 바는 르네상스의 시작을 이탈리의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제국의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발전 시키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붕괴로 비잔틴 출신의 학자, 기술자들이 피렌체로 유입되었으며 그들이 가져온 문헌과 책의 번역, 유통 등은 르네상스의 초석이 되었다. 

 

14세기 이탈리아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피렌체, 베니스, 나폴리, 교황령 등  각기 고유한 정부, 문화, 경제체제를 갖춘 도시 국가들이 편재해 있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는 지중해에 위치해 있으면서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등의 무역의 허브로 수많은 항구가 있는 해양 무역의 중심지였다. 

1548년 피렌체 공화국 (위키피디아)

 

피렌체라는 도시는 BC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피렌체 공화국은 토스카나 변경주를 관할하던 마틸다(1046~1115) 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황제파로 돌아선 주변도시와 다르게 자연스럽게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 지배에서 벗어나 코뮌체제(자치 공동체)를 설립했고, 독립국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했으며 아르노강을 중심으로 양모 무역, 제강, 무기 생산 등의 상업이 융성하였고,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이주하여 급속하게 커져갔다.

 

1348년 흑사병이 도시를 휩쓸었다. 도시인구의 1/3이 사망하였다.  흑사병이 저물 무렵 피렌체는 다시 호황을 맞아 흑사병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였고, 유럽의 상업 중심지로 진출하여 세를 넓혔다. 비스콘티 가문이 장악하고 있던 밀라노 공국은

1397년 피렌체를 공격하여 피사와 루카, 볼로냐, 시에나 등의 이탈리아 중부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비스콘티 공작이 1402년 사망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은 피렌체는 피사와 리보르노를 탈환하고 토스카나의 패권을 다시 찾는다. 

 

이무렵 "메디치 가문"이 무젤로에서 피렌체로 이주한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부동산과 금융업 등의 상업활동으로 부를 늘렸고, 1410년 피렌체에서 3번째 부자 가문으로까지 성장한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과 인본주의적 학문 지원, 전략적 정치적 영향력은 르네상스의 흐름에 깊고 다각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위대한 로렌초"로 알려진 로렌조 데 메디치(1449-1492)의 통치기간에는 문화 후원의 정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스스로 인문주의자이자 시인으로 지적 추구를 장려하였다.

14세였던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들여 궁정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게했으며 문학과 철학을 배우게 하였다. 정원에 비싼 대리석을 쌓아놓고 언제든 연습할 수 있도록 했다. '다비드상', '피에타상' 은 이러한 환경과 천재성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봄의 귀환' 도 이때 나온 걸작이다. 

 

메디치 가문 중 줄리오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그는 라파엘로와 미켈란 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2대 피렌체 공작이었다가 1569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던 코시모 1세 데 메디치(1519~1574)는 

권력을 중앙 집중화 하였고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가장 큰 미술관 중에 하나로 알려진 "우피치 갤러리"를 

조르조 바사리에게 의뢰하여 지었다.(원래는 치안 판사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함) 그리고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을 지원하였다.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여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1만여권의 고대 문헌 등 희귀도서를 사들여 공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피아노의 발명도 이 가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파이프를 이용한 오르간, 페달을 이용한 클라비코드, 지렛대 원리로 현을 울리는 하프시코드가 쓰이고 있었다. 1687년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의 아들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게 고용되어 악기 제작, 음악의 체계화 작업을 하였는데 1709년 클라비코드의 구조를 기반으로 건반에 이어진 각 현을 헤머로 쳐서 소리가 나게 하는 현대의 피아노의 원리를 고안해 제작하였다.

 

15세기 중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의 인쇄기의 발명(활자 설계, 대량생산 기술)은  인류사에 문화적, 사회적으로 혁명을 일으킨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인본주의 운동의 밑걸음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에 붙인지 두 주 만에  전 독일,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브로드시트에 인쇄하여 배포하였고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다.

활판 인쇄술은 대중들에게 신문이라는 매체를 선물하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추구하였다. 여기에는 생생한 이미지를 위한 해부학, 원근법, 빛에 대해 과학적 접근과 자세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회화에서 르네상스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 이다. 비잔틴 양식을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고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다. 자연주의적인 접근으로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여 이전에 볼 수 없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다. 단축법, 투시법과 명함을 이용해 입체감을 주었고, 풍경과 건물을 그려 넣어 배경이란 요소를 도입하였다. 아레나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애도(lamentaion)는 조토의 정수라고 평가 받는다.

조토의 애도(Lamentation), 1305 (wikipedia.org)

 

르네상스 초기 마사초(1401~1428) 그린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에 그린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 평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1377~1446, 이탈리아 건축가)와 도나텔로(1386~1466, 이탈리아 조각가)와 사귀면서 원근법이라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때까지의 2차원의 그림에 3차원의 혁명이 덧입혀지게 된다. 마사초가 그린 '성 삼위일체' 는 1427년에 완성한 높이 667cm, 너비 317cm의 거대한 프레스코 회화로 원근법으로 그려졌다. 비잔틴에서 르네상스의 전환점 역할을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1점 투시원근법)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세계 최대의 벽화 '천지창조'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wikipedia.org)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최후의 만찬"은 1495년 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 중 몇 안되는 완성작 중 하나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로 880cm, 세로 460cm 크기의 거대한 그림으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졌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작품의 벽면은 실제 벽면으로 이어진 듯 한 효과를 나타낸다. 예수의 이마를 향해서 사방의 선들이 한점으로 모이는데, 소실점이 바로 예수의 머리에 나타나게되는 일점 원근법이다. 한 점을 소실점으로 시선들 내지 초점이 모아지는 일점 원근법의 완성이라고 평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wikipedia.org)

 

 

르네상스 초기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는 철학자이며 건축가,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1435년에 출판된 '회화론(De Pictura)'은 회화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제공하고 선형 원근법의 개념을 도입하여 예술가들이 공간과 깊이를 묘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선형 원근법은 3차원의 입체인 공간 전체를 2차원의 평면에 옮기기 위한 투시법이다. 알베르티 이전 화가와 조각가의 지위는 기술적인 작업을 하는 장인의 수준이었으나 이후 화가와 조각가는 예술가로서 정신적인 노동과 이론적 바탕을 갖추고 있어야 된다는 점에서 장인과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그 근거는 기하학에 근거한 원근법이었다. 알베르티의 색에 대한 이론은 '자연에 존재하는 색상은 흰색과 검은색 두 가지뿐이고 나머지 색상은 모두 이 두 개의 배합에서 나온다' 는 것이 기본 사상이다. 또 수많은 색도 네가지 기초 색상 즉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인데 '플라톤의 4원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450년 부터 1472년 죽을 때까지 추가, 수정해 가며 펴낸  '건축론(De re Aedificatoria)' 을 저술하였는데 10권의 전집이다. 사후 1485년에 출판되었고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건축 논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고대로마 논문 "De Architectura"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다. 대칭과 수학적 비율에 대한 고전적 지식을 기반으로 조화와 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건물이 인간의 신체와 자연의 질서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건축가는 문화적, 지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수학, 역사,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미학 뿐만아니라 기능성과 실용성에 대한 부분도 강조하였다.

 

알베르티의 지식과 건축 작품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팔라디오 등 수많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건축물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피렌체)', '팔라초 루첼라(피렌체)', '산탄드레아 대성당(만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