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의 또 다른 이름은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비잔틴 제국) 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재위 306-337)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4년 오늘날 의 터키 이스탄불에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트2세(1432-1481))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까지 그 수도로 번영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한다. 325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는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공교회주의가 시작된다. 공교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신양성경), 즉 헬라어가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 이전 헬라어와 라틴어를 함께 사용)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약 90명여명의 황제, 125명에 이르는 대주교가 지배하였고, 서로마 제국의 문명화와 다르게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대체로 로마제국의 전통, 이념과 철학을 이어 받았고 예술에서는 '비잔틴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비잔틴 미술의 특징은 종교적이며 도상학(Iconography)이 주류를 이룬다. Iconography(영) 라는 낱말은 고대 그리스어의에이콘(εἰκών, eikon)과 그라페인(γράφειν, graphein)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어의 Image에 해당한다. 영어의 icon은 성화상(聖畵像), 즉 그리스도와 12명의 사도, 성모마리아,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흔히 '성화(聖畵)'라고도 부른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서 성화는 기독교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규정하였다.
이 시대의 Icon은 교육 즉 문맹자에게 성경의 내용(복음)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교육매체적 입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논란이 된 것은 '이미지' 자체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논란은 성화상 파괴 운동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미지'는 이성과 직관적 느낌으로 전달되는데 메세지를 풀어내는 색과 형태, 분위기 등으로 보는 이들이 지각할 수 있다. 깨달음을 주거나 각성, 때로는 위로와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730년 성화상 금지령이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에 의해 공표되었고, 754년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5세는 히에레이아회의를 통해 성상파괴령을 재가하였다. 815년 레오 5세에 의해 2차 성화상 금지령이 다시 내려졌는데, 843년 미카엘 3세의 섭정을 맡은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플 총회를 개최하여 '성화상에 대한 공경'으로 성화상 논쟁이 종결된다. '흠숭(Adoration)과 공경(Respect, Veneration)' 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였다.
icon은 주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강생(Incarnation)이라는 주제로 '신성과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를 시각화 하려는데 집중되었다. 비잔틴 도상들은 '성상화 논쟁' 중 거의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 이콘' 중의 하나는 시나이 반도의 카타리나 수도원(Catherine's Monastery)에 6세기경 <전능하신 하느님(Pantocrator)>으로 알려져 있다.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Byzantine-icon-of-Christ-Pantocrator-Sixth-century-The-Monastery-of-Saint-Catherine_fig1_273609771)
비잔틴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자이크이다. 여러가지 색깔의 종이, 유리, 금속, 타일 등의 조각을 붙여서 무늬를 만들거나 꼼꼼히 배열하여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교회내부를 장식(벽, 천장, 돔 등)하여 종교적인 장면으로 덮었다. 서유럽의 비잔티움 미술과 건축의 가장 중요한 사례로 꼽히는 '산비탈레 성당'이 있다.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가 동고트 왕국의 지배아래 있었던 527년에 에클레시우스 주교가 시작하여, 동로마의 라벤나 총독부 시대인 547년 라벤나의 제27대 교구장 말시밀리아누스 때에 완공되었다. (산비탈레 성당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silica_of_San_Vitale.jpg)
모자이크의 어원은 Musium opus에서 유래한 것인데 Musium으로 불리다가, 프랑스어 Mosaique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모자이크는 BC.4000 혹은 그 이전 부터로 볼 수 있다고 추측하는데 BC. 3000 초기 수메르의 도시 우르크(Uruk) 유적에서는 모자이크 건축 장식이 발견되었으며 헬레니즘기(BC 4세기~2세기)의 그리스, 로마, 비잔틴 등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초기 모자이크는 작은 돌과 자갈등을 사용하였는데 BC 3세기에 이르러 '테세라 기법'이 도입되었는데 돌조각에 대리석, 유리 등을 사용하여 더욱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 졌고, 비잔틴 시대에 와서 더욱 다양해지고 그 다양한 재료에서 나오는 빛과 조립하는 과정의 기술 발전으로 이어졌다.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표현대상의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인 위대함, 신비적 위험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정면성(Frontalitaet)의 법칙이 적용되었다. 황제의 머리 뒤에 원형의 후광을 타나내 황제권력의 신성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은 고대 이집트나 오리엔트 예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표상된 인물이 중요한 인물임을 나타낸다. 존경과 외경심을 바치는 대상 인물들을 정면에 위치시켜 엄격한 태도를 인상 깊게 나타내려 한 것이다.
비잔티움 세계에서 성당은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을 상징하며 천상의 위계를 반영하는 우주의 모델이었다. 교회 건축이 지상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 혹은 '하느님의 집(Domus Dei)을 상징한다면, 그 내부 공간의 프레스코 벽화 모자이크는 '빛'의 상징을 통해 '하느님의 현현'의 아름다움을 가시적으로 표상하는 감각적 도구가 된다. (가톨릭평화신문, 슬기로운 성당이야기, 이탈리아 산비탈레성당, 세상의 모든 빛과 함께, 2020.10.13)
비잔틴 시대의 성당에는 모자이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습기가 많았던 비잔티움은 빠르게 퇴색되거나 손상되는 프레스코화나 그림보다는 색유리, 돌, 세락믹 등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리와 금테세라에 빛이 반사되고 모자이크의 반짝임과 만나 신성과 천상의 세계를 지상으로 데리고 왔다. 모자이크에 사용된 금은 하느님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하고 경외심과 존경심을 불러일켰다.
모자이크에 빛을 사용하여 정적인 이미지 내에서 움직임과 생명력을 만들어 내고 더욱 성스럽고 영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하도록 의도하였다. 성당 내부를 가득채운 모자이크는 대다수가 문맹임을 감안한다면 성경의 이야기, 성인의 삶, 신학적 개념을 전달하는데 이상적이었고 성당의 후진, 돔, 벽과 같이 눈에 띄는 곳에 배치되어 신앙과 종교 역사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모자이크는 이콘과 함께 예술과 신앙 사이를 섬세하게 오가며 종교적 표현과 신을 찬미하고 느끼게 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비잔틴 제국의 건축은 교회의 건축이 활발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그외의 일반 건축 분야는 부진했다고 볼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은 지리적 위치와 로마 전통의 계승으로 헬레니즘 계통의 문화의 영향과 동방과의 접촉으로 페르시아 문화 등 동양적 요소가 가미된 통합과 절충적 양식을 보인다. 서양의 열주식 구조에 아야 소피아의 거대한 중앙 원형 돔을 배치하였다.
역시 가장 중요한 점은 돔과 펜던트이다. 펜덴티브(구의 삼각형 부분)을 사용하여 정사각형 방 위에 원형 돔을 배치하여 넓고 개방적인 내부를 만들었는데 아야 소피아(Hagia Sophia)의 거대한 중앙돔의 직경은 31미터나 된다. 건축재로로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4cm 두께의 얇은 벽돌은 몰타르의 줄눈과 두께가 거의 비슷하다. 벽돌은 구조적, 미적 목표를 달성하기 좋았고 쉽게 생산할 수 있는데다 다양한 패턴을 적용할 수 있었다. 색을 달리하여 횔선을 만드는 비잔틴식 쌓기 법을 만들어 냈다. 고급 몰타르는 벽돌간의 접착력을 높이는데 효과적이었다. 강도가 요구되는 곳은 당연히 석재가 사용되었다.
벽체가 얇아졌고, 로마의 아치, 볼트 와 열주에 의한 아케이드를 널리 사용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종교적 정체성,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교회 건축물은 지배계급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통치를 정당화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황제와 교회의 신성한 권위와 천부적 명령의 상징, 돔과 금과 모자이크가 만들어 낸 천상의 초자연적 경험과 무한한 하느님을 상징하였다. 건축을 위한 자원과 노동력, 기술에 대한 전문 지식은 황제의 능력을 과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