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시대 기원전 510년 경 왕정이 폐지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는 공화정 체제로 이어왔다. 로마 공화국은 권력의 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로마 공화국은 로마 제국으로 이행되는 정확한 시점은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만,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한 BC 27년을 로마 공화국이 종식된 시점으로 보고 있다.
* 아우구스투스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기원전 63년 ~ AD 14년),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림.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은 평화의 시기를 맞았는데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라고 칭한다.
로마제국은 트라야누스 황제(53 ~ 117, 재위 98~117) 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전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면서 선진 문명을 유럽 각지에 전파하였다.
로마 제국은 3세기 위기(235년~284년) 동안 로마 제국 내에서 25명의 군사황제가 난립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244년~311년, 재위 284년~305년)의 집권과 사두정치 체계와 적극적인 내정 개혁으로 막을 내렸지만,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세계의 변화를 예고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해진 제국을 한 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285년 막시미아누스를 부제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에 바로 정제(Augustus)로 승격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의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 막시미아누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Herculius, 250년 추정 ~ 310년, 286년~305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로마를 통치한 로마 황제)
293년 두명의 정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루었다.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고 각각은 황제(정제 Augustus)에 의해 통치하고 또 부제(Caeser)에 의해 보조되는 즉, 4명이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콘스탄티우스(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us, 250년 추정 ~ 306)는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양자로 들어가 부제가 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로마제국에서 부제로 갈레리우스(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Galerius Maximianus, 250년 경 추정 ~ 311년) 와 함께 다스렸다.
정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305년 퇴위하자 콘스탄티우스는 서방의 정제가 되었으나 이듬해 브리타니아 에보라쿰에서 죽었다. 그의 군대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재위 306년~337년)를 황제로 추대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료로 공인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한다. (비잔티움은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의 원래이름)
379년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테오도시우스를 공동황제로 선포되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년~395년, 재위 379년~395년)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Flavius Valentinianus, 371년 - 392년, 재위 375년 ~ 392년)가 죽은 후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통치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395년 48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두 아들중 장남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77년~408년, 재위 395년~408년) 를 제국 동부의 황제로, 차남 호노리우스(384년~423년, 재위 395년~423년)를 서부 지역의 황제로 임명한다. 아르카디우스의 나이 17세였다.
이후 서로마제국은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gustulus, 460년 ~ 511년 이후, 재위 475~476) 황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정복자인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 로마 제국의 황제라 일컬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이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375년부터 568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며, 서로마 제국의 쇠퇴가 진행 및 멸망한 이후 시기에 주로 게르만족 및 훈족 등 여러 민족들이 로마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중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4C ~ 5C) 부터 르네상스(14C ~ 15C)와 더불어 근세(1500년 ~ 1800년)가 시작되는 5C ~ 15C까지의 시기이며 유럽의 역사를 바라본는 역사적인 시선이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 비잔틴제국의 멸망까지 약 1000년의 시대이다.
중세는 467년~1000년의 약 500년을 초기(Early Middle Ages), 1000년~1300년의 약 300년을 성기(High Middle Ages), 1300년~1453년의 약 150년을 후기(Late Middle Ages)로 나눈다.
< 중세 초기>
중세의 미술은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된다. 중세초기를 최근에는 8세기 중엽을 경계로 전기를 메로빙거 왕조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로 구분하여 취급하기도 한다.
메로빙거왕조(Merovingian dynasty) 는 5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갈리아의 영토를 이어 받아 대부분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과 스위스 일부분을 로마인들의 점령 직후 5~8세기까지 통치한 프랑크족을 다스리던 왕조이며 왕족이다.
이 시대에는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아 강한 기독교 미술이 태동하고 있었고, 알프스 이북이나 에스파냐에서는 이동해온 게르만족과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이 유행하고 있었다. 5세기 경 부터 프랑크족의 여러 왕은 종교건물을 원조하게 되었는데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 바실리카는 그리스어로 '왕족의' 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건축양식이다.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국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시장, 관공서, 지붕이 있는 야외극장 등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대규모 건물을 지칭했지만 점차 장방형 회당이라는 특정 형태를 취한 건축을 지칭하게 되었다.
바실리카식 교회는 바실리카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회 기능을 갖춰 사용한 교회양식이다.
석재를 쌓아 올리는 로마 전통을 따라서 주두가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게그만인은 그 기술까지 병용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로 하였다. 갈리아 및 게르마니아 지방의 교회의 특유한 종탑도 목조기술의 산물이다.
이시기 교회는 하느님의 집(도무스 데이)라는 개념을 채용하여 제사와 성직자 중심의 교회 공간을 구성한다. 초대교회 성막의 바깥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공간 개념을 채용하여 아트리움-네이브-앱스로 구성되는 종축형 공간 구성을 이루게 된다.
※ 회랑(Atrium, 아트리움) : 초기 기독교 교회의 앞마당, 중앙에 샘(천수지)이 있어 몸을 정결하게 하고 교회당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
※ 나트텍스(Narthex): 교회당 본당 입구 앞의 넓은 홀은 정면에 주열들이 있는 전실, 참회자 및 세례 지원자를 위한 공간
※ 신랑(Nave, 네이브): 중앙의 높고 넓은 장소로 교회의 중심부분, 나르텍스에서 성가대 또는 성단소까지 이르는 장소
※ 측랑(Aisle, 아일): 교회 건물에서 시로축을 따라 길게 형성된 부분, 열주 또는 홍예받이(Piers)의 열에 의해 네이브와 분리되어짐.
※ 트란셉트(Transept): 앱스와 신랑부 사이에 직각을 이루어 같은 높이로 넓어지는 부분(칸막이 난간)
※ 앱스(Apse): 교회당에서 밖으로 돌출된 반원형의 지성(> 제단)
대표적인 건축물은 성 베드로 성당(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이 있으며, 한국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당이 1900년에 한옥과 바실리카를 결합하여 지어진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서 고트족이 이주한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비잔틴제국과의 접촉이 잦아 교회 건축에도 동방적인 것이 출현하였는데, 석조의 아치 구조와 돔도 쓰이게 되고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Ⅰ, 603년~639년) 에 지어진 생드니 대성당과 542년 힐데 베르트 1세(511년~561년)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교회를 들수 있다.
메로빙거 예술 중 금속 공예가 발달하였는데 로마, 비잔틴, 게르만 전통의 영향으로 기술과 미적 아름다움의 조화를 보여준다. 킬데리쿠스 1세(Childeric Ⅰ, 437년경~481년) 무덤은 1653년 현재 벨기에 지역 투르네에서 발견되었다. 황금으로 된 장신구 석류석 칠보, 금화, 황금으로 된 소 조각상, 왕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 등 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약 300개의 금으로 만들어진 날개 달린 곤충(일반적으로 벌이나 매미로 판단)들이 황의 클로크(망토)에 놓여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메로빙거 시대의 채식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 )은 초기 중세 유럽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이니셜과 세밀화 등의 장식을 넣어 제작된 필사본을 말하고 채식본이라는 말 자체는 채색과 금은박 등으로 장식된 서적을 뜻한다. 이 시대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텍스트의 섹션이나 장의 시작을 표시하는 장식된 이니셜이다
이니셜은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 잘 짜여진 선, 때로는 동물 또는 식물을 모티브로 한 복잡한 디자인으로 그려졌고 이니셜을 강조하기 위하여 금박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진한 파란색, 빨간색, 녹색과 같은 색도 사용하였다. 원고 텍스트에는 작고 상세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성경의 장면, 성인의 삶 등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상징적이며 종교적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교훈과 영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테두리와 여백은 시각적 풍부함을 위하여 양식화된 식물, 꽃, 덩굴이 자중 등장하고 동물이나 몽환적인 생물이 얽혀있다. 기하학적 패턴도 일반적으로 그려졌으며 로마와 각 지역의 게르만 예술 전통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로마 고전 스타일과 추상화와 기하학적 패턴을 선호하는 게르만-프랑크 예술 전통이 혼합된 것이 특징이며, 주로 표면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풍부한 장식적 어휘를 개발했다. 서양사에서 8~9세기를 "카롤루스의 르네상스" 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자크 르 고프(1924~2014), 서양 중세 문명)
칠데이크3세를 끝으로 메로빙거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간다.
사를마뉴(찰스1세, 742-814, 재위 768-814, 신성로마제국)는 카롤링거(카롤루스) 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이자 초대 로마인 인의 황제이다. 799년 5월, 반대파의 습격을 받은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요청했고,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의 기대게 된다.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인 카롤루스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 라는 이름으로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된다.
794년 카롤루스는 독일 북서부의 아헨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짓고, 사실상의 수로로 정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위엄과 영광을 되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 482-565, 재위 527-565) 때의 로마 제국의 번영과 부활을 꿈꾸고 고대의 학예 부흥을 선언한다. 이 곳을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으며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정하는 왕실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젊은 기사들을 위한 궁정학교(schola palatina)를 만들었다.
샤를마뉴의 초청된 지식인들 중 영국 노섬스리아 왕국 요크 출신의 알퀸(Alcuin of York, 735-804)은 궁정학교의 교과 과정을 체계화하고, 고대 로마의 교양 수업을 장려했다. 796년 투르의 성마르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는데, 성경과 고대의 작품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였다. 현존하는 고대의 텍스트 가운데 적지 않은 수효가 이 시기에 복사된 필사본이며, 오늘날 알파벳 소문자의 모태가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8-9세기 비잔틴 제국내에 성상파괴운동(또는 아콘파괴운동) 일어났다. 726년 황제 레온 3세(685-741, 재위 717-741)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위시한 신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화상금지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레온 3세는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편이라기 보다는 문제의 해결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일련의 전쟁으로 동쪽으로 부터 몰려온 피난민들이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우상숭배론에 친숙하였으며 이에 따라 종래 수도권과 그 주변에서 신앙의 매개체로 이용되던 성상화 혹은 성상을 중대한 오류로서 제기하고 나섰다.
정통 그리스도 역시 우상에 대한 원칙으로 성상파괴파와 동일한 입장이었으나 문제는 성상화를 우상화로 볼 것인가였다. 하지만 동방군대와 피난민들의 분노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은 일단 이를 수용하고, 황궁 정문인 칼케 대문의 모자이크를 철거하고 반응을 살핀 뒤 공식적으로 칙령을 내렸다.
교회와 수도사를 기반으로 비교적 서쪽에 기반을 둔 사람들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교황청도 예외는 아니었다. 788년까지 성상파괴는 지속되었고, 레온 3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는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사를마뉴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존중하였다. 의 전서(儀典書)인 성전(聖典)은 아름답게 꾸며졌고 금공이나 칠보로 단장되었다.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비잔틴제국과 달리 의전(儀典)과 성상 숭배를 존중하고, 인간존중과 자연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갔으며, 성상파괴운동을 피해 동방의 뛰어난 장공(匠工)들이 옮겨왔다.
사를마뉴 궁정학교(또는 Ada School)은 "고드스칼 예배용 복음집", "로르쉬 복음서", "소이슨 복음서", "할리 골든 복음서", "비엔나 대관식 복음서" 등의 초기 필사본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롤링더의 가장 초기 필사본으로 로마 고전주의의 부활을 시작하였지만 그 틀은 메로빙거 왕조시대의 인슐라 미술의 전통을 유지했다.
* 인슐라 미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 예술(Migration Period art)은 BC300-900년 사이의 대률에서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예술과 영국 섬들에서의 앵글로 섹슨(Anglo-Saxon)과 켈틱이 혼합된 예술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다색체의 몰리크롬 스타일(polychrome style)과 동물 스타일을 비롯한 당야한 예술 스타일적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9세기초, 랭스(Reims,불어:하임스) 대주교 에보(Archbishop Ebo of Rheims)가 하임스 인근의 오빌레르(Hautvillers)에서 예술가들을 모아 카롤링거의 예술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형시켰다. 하임스 학교의 표현이 풍부한 에니메이션, 특히 자연주의적인 표현이 풍성한 선으로 그려진 소묘 그림이 있는 "위트레흐트 시편집"은 로마네스크 시대로 이어지는 수세기 동안 북부 유럽의 중세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이가 있다. 어찌나 눈을 부릅떴는지 양 눈썹은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갔고, 눈알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온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웅크린 등을 감싼 옷이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물결치며 퍼져 나간다. 잉크병과 펜을 쥔 손은 물론이고, 샌들 밖으로 드러난 발가락에도 잔뜩 힘을 줬다. 그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으려는 복음 성자 성 마태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 우정아 포스텍 교수는 조선일보(2017.12.05) 오피니언, 우정아의 아트스토리-신의 목소리를 적는 성자의 간절함.
투르의 성 마르틴 수도원에서는 세 개의 큰 Touronian 성경이 만들어 졌는데, Bamberg Bible, Moutier-Grandval Bible에 이어 세번째 성경인 Vivan Bible 이 최고의 예로 손꼽히고 있다. 845년 생마르탱 드 투르(Saint-Martin de Tours)의 평신도 수도원장이었던 투르의 비비안(Vivian) 백작이 의뢰하였고, 846년 교회를 방문한 Charles the Bald에게 선물되었다.(☞ 파리 국립 도서관 소장)
카롤링거 채색 필사본은 표지가 상아 조각의 패널을 금, 은과 같은 금속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바인딩도 그러하다. 이 시대의 호화 채색 필사본은 아주 적은 수가 남아 있다. 카롤링거 금속 세공 작품으로 중요한 예는 린다우 복음서(Lindau Gospels) 윗표지와 성 에메람의 코덱스 아우레우스(Codex Aureus of St. Emmeram)의 표지가 있다.
린다우 복음서는 현재 뉴욕 모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전에는 소작하고 있었던 독일 콘스탄스 호수의 린다우 수도원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진주,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진귀한 보석이 박혀있는 황금 장정의 채색 필사본이다. 미적요소와 책을 펼쳤을 때 나머지 표지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도 함께있다. 보석을 다루은 일은 수도사의 몫이 아니었고 금속 세공인을 고용하였다. (☞ https://blog.naver.com/zoe87/222127142360)
샤를마뉴는 로마식 디자인을 모장하여 아헨 대성당(Aachener Dom)의 자신의 궁전 예배당인 팔라틴 예배당의 문을 주조하는 주조 공장을 설립하면서 대규모의 청동 주조를 부활시켰다. 예배당 내에는 청동문, 코린트식 기동, 아칸서스(acanthus)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청동 난간 등이 있다. (예배당에는 샤를마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792년 경 팔라틴 예배당과 함께 나머지 궁전 건축을 시작했도, 805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성모를 기리기 위해 축성되었다. 중앙 팔각 돔을 둘러싸고 있는 갤러리 머리 위에 16면 주보랑이 있다. 이 구조와 장식은 6세기 이탈리아 라벤나 산 비탈레 대성당(Basilica of San Vitale, Ravenna) 의 영향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샤를마뉴는 787년 라베난를 세번 방문 했다고 한다. 그 해에 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에게 편지를 써서 로마와 라벤나의 "모자이크, 대리석, 바닥과 벽의 다른 재료들"을 자신의 궁전으로 요청했다.
카롤링거 금속세공 장인들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사례는 밀라노 성 암브로시오 대성당(Basilica of Sant'Ambrogio in Milan)에 있는 황금 재단(824-859) 앞 부분 장식인 안테펜티움(Antependium, 이탈리아어 Paliotto)가 있다.
제단 4면에는 레푸세 세공으로 만든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으며 금,은 선을 구부리거나 잘라서 금속 표면에 붙여 표현하는 필리그리(filigree)세공으로 귀중석과 에나멜로 장식되어 있다.
* 금속공예 기법 중 조금(서양:레푸세와 페이싱) : 금속 표면에 정을 이용하여 문양이나 글자를 새기거나 입체감을 나타내는 금속공예기법, 평면적인 무늬나 문자를 조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돋을 새김기법
☞레푸세 : 금속문양이 나타난 면의 뒤쪽에서 두드려 금속판을 늘려 올리는 것
☞페이싱: 앞면에서 두드림으로써 형태를 좀 더 섬세하게 다듬는 기법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를 거치면서 유럽은 문화적, 지적 침체기라는 인식 보다는 실제적으로 중요한 예술적, 문화적 통합 시기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술은 미(美)를 통한 종교, 정치적 의사소통의 도구이며 인간의 삶과 시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샤를마뉴의 르네상스, 기독교, 인구의 이동으로 인한 문화의 융합은 톡특한 예술의 스타일을 나타냈으며 교회와 수도원 건축물과 내부의 장식, 채색필사본 등은 예술적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