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인간의 삶에서 수많은 얼굴로 숨쉬며 동행한다. 인간이 살아가고 표현하는 모든 것이 예술의 범주 속한다면 인간과 예술을 동일시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삶이 모두 드러나지 않듯이 예술도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더 많지만, 근원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학문화 되어 왔다. 먼저 서양 미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지식을 넓혀 보고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해 보고자 한다.
서양미술의 근원은 현재의 유럽과 중동지역, 러시아의 서부와 남부를 기준으로 하며 이후 신대륙의 발견과 인구와 문화적 전이가 일어난 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된다.
인간의 역사가 잊혀 진것이 많듯이 예술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예술을 보존하고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출토되거나 보존된 미술품을 지준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시대적 배경과 활동했던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고려하년 여 분류한다. 미술의 역사는 인간의 삶의 역사 자체이며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지만 역사적 사건과 그 사상적 파장으로 시대를 이끌기도 한다.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선사시대의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조각품이나 동굴 벽화에서 부터 시작하여 여러 문명과의 교류를 거쳐가며 발전하였으며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러 종교적 목적을 벗어나 인간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극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미술사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다. 창조된 당시의 가치, 신념, 경험 등을 반영하며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인간을 발견하게 되며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해 통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걸어온 시대의 독특한 표현을 감상할 수 있으며 예술적 전통과 연속성 가운데 변화를 인식하고 정체성을 공유한다. 인간의 삶이 예술과 동일시 된다면 예술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그 자체를 탐구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시대, 미노아문명, 미케네 분명 이후 고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중세로 넘어온다. 중세초기 부터 현대에 이르는 예술의 개요를 짚어보고 각 시대로 좀 더 들어가 보고자 한다.
중세시대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 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들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는데 지방 곳곳에 스며들었던 기독교는 5~7세기에 걸쳐 교리적 통합을 이루고,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게 된다. 로마제국의 붕괴이후 10세기 경까지의 사이를 중세 초기로 분류하고 있다.
5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갈리아의 영토를 이어 받아 대부분의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과 스위스 일부분을 통치했던 던 메로빙거 왕조이 미술은 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중간점으로 보고 있다. 8세기 말 제2대 프랑크 국이자 초대 로마인의 황제인 카롤루스 마그누스, 프랑스 발음을 따른 샤를마뉴는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였다.
기독교 미술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 가운데 만들어 졌으나, 봉거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변화되었고 교회의 건출 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고대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하고 있던 서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달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용인령의 공포는 비잔틴 미술의 출발점이 있어 이미 궁정의 지지를 받고 있어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생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지만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와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동방적 요소,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위에 새롭운 형태로 전개되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으며,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재흥기를 가졌다.
10세기 부터 12세기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른다. 로마네스크란 원래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호칭을 붙여졌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로 각지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넓혀지면서 중앙집권제가 붕괴되었는데,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에서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수도원의 상호간의 교류,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각지의 양식,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 있었다.
12세기 말 북부 프랑스에서 고딕 미술이 발생였는데, 건축에도 영향을 주어 고딕 건축이 발달하였다. 서유럽 전반,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는데, 15세기 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고딕 건축은 첨탑으로 인해 수직선이 강조되고 육중한 벽과 기둥 보다는 가냘픈 기둥과 넓을 창을 가진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내는데 이전의 로마네스크 건축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고딕 양식은 건물 내부를 '스테인 글라스'로 장식하여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을 보여준다. 색유리의 사용은 이미 6세기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이 예술이 꽃 필수 있었다고 본다. 중세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투과광의 영롱함을 결부시켰다.
14세기 부터 16세기 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예 부흥, 문화 혁신 운동이라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다. '암흑시대'라 불리우는 중세시대를 극복하고 '재생', '부활'로 번역되는 르네상스의 기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인분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그리스도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본주의(humanism)이라고 정의하였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로 인하여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초기 근대의 시작이라는 전환기적 시점인 것은 확실하다.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동로마 제국과 활발한 교류로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회복한 것도 이유일 수 있으나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의 지식인이 이탈리아로 대부분 이주했던 이유도 있다. 이탈리아 중에서도 피렌체의 발전이 독보적인데 그 원인은 '메디치 가문'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350년간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르네상스의 주역 메디치 가문 이야기, G.F. 영, 이길상 역, 현대지성) 에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시기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49~1492)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산드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 시기 인쇄술의 등장과 종교개혁 등은 예술의 주제의 변화도 가져왔다. 교회의 권위와 성상 숭배에 대한 비판으로 개혁파 신자들은 성경자체를 강조하여 더 많은 성경 장면과 이야기가 등장하였고 1400년대 자연주의가 주류를 이루며 인체와 자연(풍경)을 표현되었고 종교개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판화가 널리 사용되었다.
르네상스를 토대로 고전주의(Classicism)이 등장한다. 단정하고 정형화된 형식미를 특징으로 하고 조화와 균형, 완성을 중요시하는 예술 사조라고 평가한다.
이후 근세로 접어들어 1520년 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매너리즘(Mannerism or Late Renaissnce)이 유행한다. 메너리즘은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에 따라 예술 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를 말하며, 1600년대 바로크가 시작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자연스러운 조명 등의 특징이다. 인체의 표현이나 색채, 피사체의 구도에 있어 르네상스적인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을 구하기보다는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목적을 가진 분명하고 색다른 느낌'을 부여하고자 했다.
매너리즘 시대가 지나고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미술, 음악, 건축 등에서 나타난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 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화가는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71~1610)이다. 자연주의적 특징, 사실주의, 테네브리즘까지 나아가는 명암기법 사용으로 카라바조주의(caravagisme)가 등장하였고, 수많은 위대한 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활동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가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고 에스파냐에서는 벨라스케스(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 1599~1660), 스르바란(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1598~1664),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푸생(1594~1665) 등이 활동하였다. (↑ Supper at Emmaus, Caravaggio(1601))
* 테라브리즘 : '어두운', '신비로운' 등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tenebroso'에서 유래, 전반적으로 어두운 화면에 중간 단계 없이 강렬한 빛을 삽입시킨다. 연극의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쓴 것처럼 신비롭고 극적인 효과를 낸다.
루이 14세가 누렸던 장중한 베르사유예술이 지고 18세기 로코코(Rococo or Late Baroque)의 시대가 등장한다. 루이15세, 루이 16세 시대에 크게 유행핬다가 프랑스 혁명(1789) 이후 쇠퇴한다. 로코코 양식은 바로크 양식이 수정되고, 약화되어 왕실예술에서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로 이어진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이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된다. 프랑스에서는 앙투앙 바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 이 있고 이탈이아에는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크로사토(Giovanni Battista Crosato, 1685~1758)등이 있다.
18세기의 로코코 양식은 루이 15세 시대(1730~1750)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으로 한 시대를 대표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신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등장하고 서로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서로간에 영향을 주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다. 1750년대부터 1820년대 사이의 예술 사조이며 어원은 고대 로마 시민 중 가장 높은 계급인 'claussicus'이라고 한다. 조화, 명확성, 절제, 보편성, 이상화된 아름다움이라는 고전적 이상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했다. 이 시대의 예술가와 건축가는 고대 유적, 조각품, 문헌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고전 예술의 순수함과 완벽함을 모방하려고 노력하였다. 깊이와 비례감을 표현하기 위해 선형 원근법을 사용하였고 정확하고 깨끗한 선과 명확한 윤곽을 강조하였다. (↑ Jacques-Louis David, Le Serment des Horaces(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대표적 화가는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 등이 있다.
18세기 부터 흔히 부르주아라고 일컫는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들이 성장하였고, 왕족과 귀족에 이어 예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들의 취향에 맞춘 예술 사조가 떠 올랐다. 급격한 도시화로 공업화가 되어 가는 도시와 반대되는 평화로운 시골의 평화로운 전원 같은 곳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등을 겪었던 시민 문화는 감정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이 주류를 이루었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중세 유럽의 통속소설을 의미하는 로망(roman)에서 나왔다. 신고전주의가 자연을 추구한 것과 같이 낭만주의도 동일한 것을 추구했는데 낭만주의의 시각은 자연은 억제되지 않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대표적인 화가는 프랑스의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1793~1824),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1798~1863), 스페인의 화가이며 판화가인 프란치스코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등이 있다.
17세기 경부터 사진술이 등장하는데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이다. 프랑스의 미술가, 사진가인 루이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 1787~1851)는 1837년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 (다게레오타이프)를 완성하여 촬영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다. 이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 부터 공훈과 포상을 수여받았다. 사진술이 발전은 당시 화가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인상주의(파)가 등장하게 된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은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기존 예술과 가장 큰 차이점은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주의와 구별되는 점은 현실의 기계적 재현이 아니라 실재 가운데 내면의 감각을 이용한 개인의 주관성(느끼는대로)을 놓치지 않았다고 평가 한다. 인상주의의 각가는 프랑스의 모네(Claude Monet,1840~1926),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드가(Edgar Degas,1834~1917),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 고갱(Paul Gauguin, 1848~1903) , 네덜란드의 고흐( Vincent Wilem van Gogh, 1853~1890)등 현대에 많은 인지도가 있는 화가들이다.
1905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미술사조로 표현주의가 있다. 1, 2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 사용하였다. 보통 고흐와 고갱부터 표현주의 경향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 발전했던 독일의 표현주의는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된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이 시기의 야수주의, 초기 입체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자연의 모방을 거부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이 있으며 하위 학파로 다리파(Die Brücke),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가 있고 표현주의 경향으로 묶을 수 있다.
20세기 이후 유럽은 19세기 까지의 사실주의 미학을 넘어 순수한 형태의 조형성, 색채의 독자적인 표현력을 제가기 추구하면서 추상미술에 도달한다. 또한 합리주의 정신에 반하여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즘이 나타난다.
추상(Abstract) 은 abs(from) + tract(draw), 무엇에부터 잡아 뺀다 라른 뜻이라고 한다. 형태를 이루는 본질(essence) 로 추상미술자들은 from에서 점(dot), 선(line), 면(plane), 그리고 색채(color)을 빼내었는데 이것을 순수 조형 요소라 한다.
20세기 초에 들어 프랑스에서 포비즘과 큐비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미래파 등이 등장한다.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1826~1898,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의 문하생인 마티스(1869~1954, 프랑스), 마르케(Albert Marquet, 1875~1947,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포비즘(fauvism ,야수파)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를 비판하고 나선다. 이들에게 도전을 준 것은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고흐와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들은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큐비즘(Cubism, 입체파)은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났으며 조르즈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1963)의 풍경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브라크는 풍경화를 그리면서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어 여러가지 원책을 칠하며 자연을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출발은 분석적 큐비즘, 종합적 큐비즘, 황금분할파 큐비즘으로 발전한다. 매래파는 1909년 이탈리아의 시인 피리포 톰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에 의해 제창된 예술운동이다. 산업혁명 이후 발달해가는 기술 문명에 고무되어 과거의 전통에 대한 부정, 근대 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에 대한 찬미, 미래적 낙관 등이 주된 흐름이다. 미래주의는 근대 디자인 이론의 발전선상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퀴비즘(야수파)의 영향으로 1915년 말레비치(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 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9~1935, 러시아)는 쉬프레마티즘(Suprematism, 절대주의)을 주창한다. 순수한 형태에 의한 구성을 목적으로 하였고, 모든 시각적인 대상을 버리고 이것을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는 추상적 도형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시킨 형태로써 화면에 배치 하였다. 검은 정방형을 기조로 하여 여기에 원 ·삼각형 ·십자형 등을 조합한 단순한 화면이다.
말레비치는 이 화면은 어떤 상징도 기하학도 도안도 아니며, 내면의 질서에 따라서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된, '자연을 훨씬 초월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으로, 그는 '절대'라고 선언한 것이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하였다. 하지만 그 이념은 유럽에 있어 추상미술의 기반이 되었고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네덜란드,1917), 바우하우스(독일어,Staatliches Bauhaus, 1919~1933, 독일에서 운영된 학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Dada or Dadaism)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하는 예술 사조이자 실존주의, 반문명, 반전통적, 허주의 예술운동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독일을 시작으로 중부 유럽으로 퍼져나가 1920년과 1923년 사이 프랑스 파리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가 1924년 파리에서의 다다이즘은 사그가 들었다.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 1896~1963, 반체제 다다이즘 운동의 창립자) 는 1919년 스위스에서 파리로 이주 한 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 프랑스)과 다다이즘 운동을 이끌었으나 이후 브르통이 다다이즘 운동의 허무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1924년 <쉬르레알리즘 선언>과 <쉬르레알리즘 혁명> 지를 간행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 2차 대전 사이 취리히 다다에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1917년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프랑스)가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주창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원시미술을 재조명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의 공간안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우리의 내적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욱 현실적이다”라는 샤갈의 말은 그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화가란 자신의 내면에서 보이는 것은 뚜렷한 윤곽으로 그려내거나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의식, 꿈, 환상의세계를 탐색한다.(고승근,2001,p9)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 심리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무의식, 꿈과 같은 세계를 연구하고 내면세계를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구현하였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에서 196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을 이후 미술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든다. 앵포르멜(Informalism or Art Infomel)과 액션 페인이 전쟁의 폐허를 넘어 새롭게 등장한다. 앵포르멜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이다. 추상의 서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형성되었고,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미셀 타피에( Michel Tapié de Céleyran, 1909~1987)가 이를 앵포르멜(비정형)이라고 칭했다.정해진 형상을 부정하고 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의 효과를 살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하였으며, 이후 국제적인 예술운동을 전개되었고, 미국에서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까지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on)은 1952년 미국의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 Harold Rosenberg, 1906~1978) 가 명명한 후 미국의 대표적 표현양식이다. 이미지의 정착보다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에서 순수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이다. 잭슨 폴록(1912~1956), 빌럼 데 쿠닝(1904~1997), 프란츠 클라인(1910~1962) 등에 의해 대표된다.
(←Jackson Pallock, 'No. 5, 1948', 1948)
이후의 예술의 흐름은 '이즘' 에서 '아트(art)' 로 명칭한다. 팝 아트,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정크 아트 등이 있다.
특정 학파나 운동에 대한 집착보다 개인의 표현을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예술가의 다양한 방식과 의도를 인정하고 폭넓은 창의적인 표현을 포용하고자 한다.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치보다 아이디어가 우선시 되는 개념 미술과 같은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팝 아트(pop art)는 1960년대 초엽에 뉴욕을 중심으로 출현한 미술로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클리스 올덴버그 등이 대표작가이고 옵 아트(Optical Art)는 기하학적 추상의 연장선상 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시각적 착시 요과를 이용한 새로운 경향이라 할 수 있으며 1960년대 팝 아트와 동시대에 시작되었다. 빅터 바사렐리(1906~1997,헝가리계 프랑스), 브리짓 라일라(1931~, 영국) 등으로 대표된다.(→ Bridget Riley, Achæan, 1981)
지금까지 중세시대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예술사를 훓어 보았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 성찰등이 각 시대의 사회적 맥락과 작가의 스타일과 철학으로 버무러져 끊임없이 진화해 오고 있다. 신앙과 봉건제에서의 '신'에 대한 이야기, 르네상스를 거치며 '인간-휴머니즘'의 재발견, 바로크 시대의 드라마틱함과 웅장함을 넘어 혁신과 추상화를 시도 했던 모더니즘과 다원주의와 개념주의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드니즘과 현대 미술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걸어왔던 예술의 시대는 과거형이 아니다. 인간이 현재를 살아고 미래를 살아가는 것 처럼 끊임 없이 인간고 함께 새로운 도전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인간의 삶을 발견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인간과 예술이 걸어 왔던 길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고 문화유산의 풍요로움과 삶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탐색해 보고자 한다.